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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신앙에서 신학으로 ➊

신앙에서 신학으로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계 2:2)

  누군가 필자에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그것은 이제 신앙(Faith)교육이 아니라 신학(Theology)교육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not A(신앙), but B(신학)가 아니라, 방향, 즉 ‘신앙에서(from) 신학으로(to)’입니다. 이말은 지금까지의 신앙교육을 포기하고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육도 이뤄져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런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 다른 말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어찌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에게나 필요한 신학을 가르치란 말인가?

  한국에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어 기독교가 들어 온지 15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교육의 중심은 기독교의 복음을 소개하는 것과 기초적인 교리교육 그리고 그 밖의 교회와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일반적인 신앙교육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전해지고 그 사회에서 기독교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런 초보의 단계를 지나 성숙의 단계, 다소 덜 은혜스러울 수는 있어도 자기를 성찰하고 더 높은 차원의 것을 지적(知的)으로 소화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입니다.

  신약 성서에도 기독교의 초기 선교사였던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비 세례자’들이 주로 그의 수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서신인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복음’과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후 한 세대가 지난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듯이 말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가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한 이유는 야고보서의 수신자들 중 대다수가 이미 복음을 접하고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야고보서의 저자가 ‘믿음’을 가볍게 여겼다거나 강조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세대 전파자인 바울에 의해 교육받은 믿음을 강조하는 기존의 기독교 교육이 ‘행위’가 빠진 불완전한 믿음으로 향하고 있기에 그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신앙’과 ‘은혜’를 주로 전파하며 그것만 강조하려다 오히려 온전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신앙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신학교육이 필요할 때입니다.

   신학교육은 필요 없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는 ‘신학’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소위 보수 교단 신학보다는 진보 교단에 속하는 신학에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진보적인 신학은 흔히 ‘자유주의 신학’이라 여겨 그것을 배우면 신앙생활과 교회 공동체에 오히려 해가 되는 학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간다고 하니, 같은 동아리 선배들은 하나같이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사탄의 신학교라고 말렸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마치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빨간색에 갖고 있는 트라우마(trauma)처럼 신학에 대해 갖고 있는 허상의 두려움일 뿐이지 실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신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생들이나 목회후보생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시 필자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같은 동료로부터 (농담이길 바라지만종종 듣던 말 중에 하나가 ‘신학은 목회하기 위해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밟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실상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또한 신학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이유는 신학생들에게는 좋은 설교한편을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설교를 직접 작성할 수 있는 ‘눈’과 ‘방법’을 열어주고 습득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학교육의 목적입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창의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사고 능력을 키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전자는 일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번 듣거나 사용하면 더 이상 반복하기 어렵지만, 후자는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런 신학교육 방침과 신학생이 요구하는 것과의 괴리는 신학생들이 신학에 관심을 덜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2-3년이 지나면 이런 단순 ‘지식’들은 모두 소진되고 맙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일회성 지식과 프로그램을 찾아 다른 곳을 그곳에서 방문하여 배우려합니다. 그러다가 지친 목회자들은 비로소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교 시절 공부를 잘 했어야 했다고. 목회자들이 다시 신학교를 방문하여 공부하는 이른바 ‘재교육’이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정보’나 ‘자료’들이 소진되었거나 이제는 다시 스스로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지식의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한 지식을 읽어서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지식의 소비자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읽어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재창조한다면 그것은 지식의 ‘생산자’요 ‘창조자’입니다. 신학교육은 이런 지식의 생산자와 창조자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오늘날 개신교 강단에서 신학이 있는 설교를 찾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회자들도 신학을 홀대하는 판에 교회에 신학이 있는 설교나 신학 교육받은 교인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성도들에게 신학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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