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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신앙에서 신학으로 ➋

신앙에서 신학으로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우리는 지난 호에서 신학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성도들에게 신학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1. 하나님을 제대로, 더 알고 싶기 때문에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이란 말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도 등장하는데 신(theos) 과 말, 이성(logos)의 결합으로 형성된 단어입니다. 즉 신에 관한 이야기이자, 학문을 뜻합니다. 아마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공통된 바람일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저자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라고 번역된 “γινωσκω”는 ‘인식하다, 배우다’의 뜻도 갖고 있습니다. 요한에 의하면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선포의 배경에는 영지주의 영향이 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단순히 영지주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상적 틀을 사용하여 예수가 누구인지 전하는 데 그의 신학의 목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필자도 일반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누가 전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성경을 읽고 참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를 제대로 읽어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이 신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입학 시절만 해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신학을 학부를 졸업한 후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 개신교 목사인 H. P. 로이어는 성경을 읽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 역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이어 목사의 대답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도들이 세계 어느 나라 신앙인들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고 있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게 많이 성경을 읽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처럼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서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질 당시 교회는 이 사회개혁의 주체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은 수준급(?)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과 신앙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고(성찰), 자신의 믿는 바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은 교회에서 신앙교육과 관련된(소위 은혜 위주의) 양육 프로그램은 많이 받았겠지만, 성경에 관한 객관적/학문적 접근을 위한 교육은 상대적으로 접해볼 기회가 적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보다는 설교나 신앙의 멘토들을 통해서 듣는 데에만 익숙합니다. 이런 행동의 반복으로 대다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도 생소한 것이고 낯선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공동체는 여전히 성경에 대한 갈망과 신앙의 열정이 뜨겁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성도들의 신앙 열정을 신학교육을 통해 성숙으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2. 내가 믿는 바를 설명할 수 있기에
  교회에서 ‘신학’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믿는 바에 관해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독일의 신약신학 교수인 A. 린데만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신학이란 신앙에 관해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내가 ‘믿는 바(Glauben)에 관해 객관적이면서 학문적(akademisch)으로 설명(Explizierung)’하는 작업입니다.우리 기독교인 중 과연 몇 퍼센트가 자신의 믿는 바에 관해 누가 들어도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관해 얼마나 논리적 개연성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 한국 교회에 신학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무엇이든지 질문하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그것이 성경에 관한 것이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성경에 대하여 그리고 신앙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들에 관해 가능한 합리적/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대한 질문한 이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학 하는 이유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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