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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신앙에서 신학으로 ❸

신앙에서 신학으로 (3)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나는 지난 하함시 생각(2022년 9/10 그리고 11/12월호)을 통해 한국교회에 왜 신학교육이 필요한지를 설명했습니다.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의 신앙, 즉 내가 믿는 바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말하려고 합니다.

3. 신학교육은 거짓 가르침(예: 이단)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해 줍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소개된 이후로 요즘의 한국처럼 기독교 이단이 활개 치는 시대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포교 활동은 날로 치밀해지고 교묘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 포교 대상은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보다는 이미 교회에 다니는 기성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의 전략대로 교회가 통째로 넘어가거나 순진한 교인들을 빼앗기는 실정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이단 포교 활동에 대처하는 교회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가엽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교회 게시판이나 정문에 ‘이단의 접근을 불허한다’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것은 근본적인 대처방안이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안은 성도 개개인이 이런 이단들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는 신학적 기반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들의 감언이설이나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현대 기독교 교회들이 배워야 할 훌륭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요한계시록 2:2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당시 만연해 있던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을 접했을 때 이들을 테스트(peira,zw)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거짓된 것을 찾아(eu`ri,skw)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계시록 안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기독교 전통과 상당히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기독교 이단 사상들에 노출되었는데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을 검증할 수 있는 신학적인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기독교의 교리(Dogma)가 확립되지 않은 시절이라 더더욱 기독교 이단들이 번성했는데 유독 에베소 교회만은 이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 안에 이단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교인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리 앞에 순한 양 떼처럼 우리 교인들을 무방비 상태로 놔두어야 할까요? 우리는 교인들을 물고 가는 이리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지금의 신앙교육 즉, 성경 공부 중심의 교육 내용을 달리해야만 합니다. 은혜롭고, 교회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존의 신앙교육에 신학적인 틀과 내용을 채워 넣거나 아니면 새롭게 체계적인 ‘신학 과정’을 신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스스로가 성경을 읽고 그것의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가르침을 들을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할 당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가톨릭)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대부분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성서 또한 라틴어로 읽혔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 대부분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고, 당연히 성서의 뜻과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수도사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번역을 통해 성서를 일반 평신도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평신도들도 수도사들의 도움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루터의 노력은 수도사들의 해석과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던 ‘성경’을 세상 속으로, 대중 속으로 보편화하고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제 루터를 통해 기독교가 한 단계 더 발전했던 것처럼, 오늘 한국 기독교도 한 단계 더 도약할 때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수도사들의 전유물이었다가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이제 신학도 목사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에서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신교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개신교는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만인 제사장설’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이 하나님과 성경을 제대로 알도록 돕는 학문이라면 교회가 이것을 ‘금(禁)’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권장하고 더 가르쳐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절대로 어떤 논리나 주장으로 허물어지거나 흔들릴 그런 약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교회 안에서 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형식이나 방식은 어떻든지 그 내용은 성서, 기독교적인 사상과 철학 그리고 역사를 다루고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성경책을 스스로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 스스로가 말씀으로 자신을 읽고, 세상을 읽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말씀대로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이단 가설들이 소리를 높인다 해도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신화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인식과 성경에 대해 단순한 지식 정도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관점도 신학교육을 통해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우리의 삶 자체도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될 것이고 이런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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