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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왜 다시 하늘인가?

왜 다시 하늘인가?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오래전 니체(F. Nietzsche)는 21세기를 가리켜 ‘최후의 인간’이 살아가는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인간의 자화상을 내다보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음으로 가득한 시장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장은 파는 자와 사는 자가 스스로를 감추면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더 존중받고 함께 추구해야 할 덕(德)이었는데, 이제 인류는 개인과 자기 이익만이 중요하고 이것을 위해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그야말로 초개인주의요, 상투적인 소비주의 시대로 빠르게 질주하는 배에 탑승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피로사회’와 ‘우울 사회’로 진단한 한병철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21세기의 질병으로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질병들은 21세기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발생한 부작용들입니다.

   시대를 달리하지만 이 두 철학자에게 비친 21세기 인류의 모습은 가슴에 아무런 별도 품고 있지 않고, 새로운 별을 잉태하지도 못하는 최후의 인간이 살아가는 삶, 그리고 싸구려 소비주의와 개인 및 허무주의 그리고 신경성 질환으로 점철된 사회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교육을 잘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상의 가치나 구원을 믿지 않으며, 이것들은 더 이상 대화의 주제가 못됩니다. 이들은 오로지 지상의 세속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현재 상태에 그야말로 올인(All-in)하는 삶입니다.

   일본에는 한때 젊은이를 일컫는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일본 젊은이들이 한편으로는 비전, 꿈과 같은 이 땅에서의 초월적인 삶을 헛된 욕망으로 치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집이나 자동차, 멋진 옷이나 화려한 귀금속 등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하고 사는 신종 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토리란 말의 뜻처럼 ‘깨닫고’, ‘득도’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이것은 애써도 안 되는 현실의 무력감과 절망을 보여주는 수동적 허무주의에의 발로입니다. 이런 경향은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삶이 덧없고 불안한 시대가 또 있었을까요? 이 땅에 무기력과 허무의 감정은 더욱 거세지고, 존재의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로 초조와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21세기에 샬롬,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어느 철학자처럼 일상적 가치를 부인하고 천상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갖고 살아가는 ‘초인(Übermensch)’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이 땅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 이 땅에 충실하며 살아야 할까요? 천상의 가치에서 현재의 무의미한 삶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긴 사람 중 한 사람이 밀란 쿤데라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의 축제)

   그는 무의미를 즐기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니체의 초인은 바로 밀란쿤데라와 같이 천상의 가치나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의미’의 의미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자일 것입니다. 나는 밀란 쿤데라에게 우리가 자칫 잊고, 보지 못하고 살기 쉬운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소중함을 깨닫도록 해줌에 감사합니다. 살아도 보고 외쳐도 보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이 세상, 여리고성보다 더 굳건하게 잠긴 현대의 부정, 불평등, 불의의 거대한 성(城)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내 작은 능력과 세상의 거대함에 절망하게 되지만 그 안에서 숨을 쉬게 하고, 의미를 발견하게 해서 현재를 버티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한때 내가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을 때 신윤복의 다음의 말은 나를 다시 삶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담론)

   기독교인들에게 평안했던 시대가 언제 있었는가 십지만 그중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힘들고 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서신이 신약 성서 중에 ‘일반서신’들입니다. 거기에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제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들이 ‘나그네’(벧전), ‘거류민’(벧전), ‘안개’(약) 같은 것 등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하늘나라로 돌아갈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체가 부정하고자 한 것은 성서의 ‘신’이 아니라, 종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 그들에 의해 선포된 ‘저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져 버린 시대, 신마저 죽어버린 이 시대에, 나는 현실에 대한 믿음과 피안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잃어버린 사회는 삶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가 사라지고 이로 인해 허무주의의 감정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 평안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환영을 좇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래전 종교인들에 의해 타살된 신, 그리고 그 신과 함께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평안을 찾는 길은 오직 죽은 그 신을 다시 살려내는 길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신 안에만 참된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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