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며칠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고 계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주제는 자연스럽게 요즘 청년들의 예배 참석과 사역의 어려운 점들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목사님의 고민은 교회에 청년들이 많이 줄고 있으며,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수평 이동이 많이 늘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관해서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그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의식이 있는 청년들은 벌써 교회를 떠난지 오래되었고, 그나마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들조차 교회에 그런 기대를 안한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수만이 언젠가는 교회가 변할 것을 기대하면서 다닌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인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게 된다면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한 결과일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마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인구 구조가 노년층은 점점 많아지는 데 비해 젊은층은 점점 줄어 드는 소위 역삼각형 형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청년 세대가 비어있는 이른바 공동화 현상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더 이상 체질개선을 미루어선 안 됩니다. 이렇게 가다간 10~20년 뒤 한국교회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교회가 되고 말것 입니다.
따라서 지금 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청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 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입니다. 이들은 이해되고 검증된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이해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물론 신앙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 존재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 역시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이런 방법들을 활용하지 않으면 청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합리적인 바탕 위에서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이 없거나 기독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설교를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는 2000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변론과 검증을 거친 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 또한 매우 깊은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과제는 이런 깊은 영적인 진리를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여기에 설교자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저는 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며 신학생들에게 훌륭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특별히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헬라어’와 ‘철학’ 과 ‘예술’입니다.
먼저 설교자는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어로부터 본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상시 사용하는 한글 번역본만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나마 한글 번역본 이나, 영어 번역본이라도 여러 종류를 비교하며 연구하면 낫긴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합니다. 훌륭한 설교자라면 원전을 읽고, 저자의 의도와 원문의 의미를 파악해서 번역본이 다 전하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작 업을 할 수 있으려면 헬라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가장어려워하는 과목이 헬라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헬라어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언어 특성상 어학은 6개월만 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는 사실을기억하고, 설교자는 헬라어 연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철학은 해석의 도구입니다. 헬라어를 통해 찾아낸 원석은 이 시대에 맞는 언어와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진부하게 느껴지고 뻔한 것을 전달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설교자가 철학이나 문학이라는 도구보다는 TV 드라마나 자기계발 서적 같은 누구나 접하기 쉬운 가벼운 것들을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설교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많은 부분이 이런 내용들로 채워진다면 그 설교는 ‘가벼운’ 설교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철학은 인간과 지혜 그리고 근원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입 니다. 그 속에는 인간에 관한 질문과 세상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이 궁금해하고, 고민하는 많은 주제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철학자에 의해 다루어졌고, 나름의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철학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고 창의적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도 여러 각도로 읽고 해석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 강조하는 세 번째는 예술입니다. 이것은 설교의 영역보다는 예배를 위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은 이성만으로는 신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의 영역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예술에는 아폴론적인 것으로 대변되는 조각이나 문학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음악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음악(찬양)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적인 면을 살려서 ‘하늘나라’의 영적인 것을 맛보게 한다면 성도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하늘나라’의 영역을 경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술은 전공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설교자에게 꼭 필요한 분야임을 기억하고 예술을 이해하고 예배에 적용하는 데도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여전히 중세 시대의 신화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갇혀 그때의 가치관을 고집하며, 과학과 이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 가치관은 잘못됐다고 이원론적으로 선포한다면, 청년들은 그런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것이며 교회는 세상으 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입니다.
21세기는 대전환의 시대로, 기존의 전통적인 신앙교육만으로는 대처하기 힘든 다양하고 복잡한 시대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도전 속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변화를 거부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고,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상상조차 하기 싫은 퇴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행해지는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의 소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이 인정하는 기독교, 젊은이들이 다시 찾는 매력적인 교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통찰력과 실력을 겸비한 설교자와 성숙한 성도가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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