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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유다의 법칙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시점에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소수의 창조적인 인물들에 의해 일어날 때는 인류 역사에 큰 유익이 됩니다. 하지만 소수의 악당, 소위 빌런(Villain)들에 의해 일어날 때는 인류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if)은 없다지만,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요? 또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J. F. 케네디 대통령이나 A. 링 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역사, 아니 세계사는 어떻게 변하게 되었을까요? 이처럼 위대한 인물들이나 기대를 모았던 일들이 소수의 빌런 들에 의해 틀어지거나 망치게 되어 그 사회나 국가, 더 나아가 인류 역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나는 ‘유다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다’는 신약성서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로마의 군병들에게 팔아 버린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이런 ‘빌런’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학교나 직장 심지어는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이런 빌런들은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소 수 빌런들의 행동은 그들이 가진 동기의 정당성의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 공동체에 큰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는 대다수의 사람이 원하는 곳이 아닌 그 반대의 길, 원치 않는 곳으로 흘러 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훨씬 더 많은 긍정적이고 정상적인 선한 사람들에 의해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많은 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적은 무리의 이런 ‘유다’들에 의 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학교 현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영화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들을 통해 학교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선량한 학생들이 소수의 빌런들에 의해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시달립니다. 이런 영상들을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당하고 있는 ‘피해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침묵하는 다수의 같은 반 친구들입니다. 왜 이들은 같은 반 친구가 무참히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걸까요? 왜 이들은 빌런 들의 행동을 말리거나, 저항하지 않는 걸까요? 자기도 그들에게 똑같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우리는 과연 이런 사건과 사고들을 빌런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빌런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보다 더 많은 무리의 방관과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하는 다수 때문에 비극들이 우리 주변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합니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다수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원치않는 불행한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유다의 법칙’은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빌런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크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1 명의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경종이기도 합니다. 우리 학교나 교회, 주변에는 훨씬 더 많은 정상적이고,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롯 유다’와 같은 빌런들이 행동할 때 ‘침묵’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들 또한 제2의 유다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희생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인류의 부정적인 역사는 계속 반복하여 발생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행동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 주변 에서 이런 빌런들에 의해 고통 받거나, 역사에 후회가 될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침묵하거나 방조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는 매순간 소중하며,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