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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신앙에서 신학으로 ④

신앙에서 신학으로 (4)

                                                                           글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저는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교회에서도 일반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4. 그렇다면, 어떤 신학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실 교회에서 신학 교육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신학은 성도들의 신앙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일 것입니다. 몰랐을 때는 그냥 무조건 믿으면 되는데, 신학을 통해 뭔가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믿음에 의심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입니다.

필자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민 없이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3년의 과정을 밟았습니다. 첫 학기는그야말로 생전 처음 받는 신학 교육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고, 대학 시절 몸담았던 기독교 동아리 선배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교수님들의 가르침은 기존의신화적이고 순진했던 나의 모든 신앙을 완전히 허물어뜨렸습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쓰지 않았다”, “바울 서신은 바울이 쓴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있다.” 등등. 학기를 더해가며 철학과 종교, 역사와 교육 더 나아가서 조직신학,해방신학, 민중신학, 토착화 신학 등을 공부하면서 기존의 저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신학을 공부하는지... 나의 신앙심은 바닥을 치게되었습니다. 이런 학문들은 내가 지금껏 교회에서는 들어보지도,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신학은 어린아이 같은 초보적 신앙에 머물러 있던 나의 모습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학기를 거치면서 허물어졌던 내 신앙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새로운 신학의 벽돌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벽돌은 어린아이의 초보적인 신앙이 아니라, 어떤 외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신학이 균형 잡힌 새 믿음의 건물을 세워갔습니다. 이전의 신앙이 모래로 쌓은 집과 같았다면, 이후의 신앙은 콘크리트와 철근을 섞어서 지은 훨씬 더 튼튼하고 견고해진 집과 같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듣기로 처음 순수했던 신앙을 가진 자가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시험에 빠져 중간에 자퇴한 예도 있다고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내에 전해져 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1학년 때는 ‘목사’, 2학년 때는 ‘장로’, 3학년 때는 ‘집사’ 그리고 4학년을 마치고 졸업할 때는 ‘평신도’나 ‘무신론’자가 되어 나온다는 말입다. 비록 이 말이 조금 과장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신학은 신앙을 새롭게 세워는 것, 즉 신앙을 재건축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엄마 젖만 먹던 아이에게 딱딱한 음식물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던 교인에게 내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며, 믿는 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성경의 해석은 더 이상 목사님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신도들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신교 전통입니다.

신앙의 재건축은 어려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때론 내가 지금까지 알고 믿었던 바와 달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통일 뿐입니다. 이것을 이겨내야 진정한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 및 행동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13:11).”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는 신학이라는 공부를 평생토록 해야 합니다. 공부(工夫)가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이 공부 아니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떤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어느 특정 교단의 신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에는 많은 교단이 존재하며 그리고 교단마다 가진 신학의 장점과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런 다양성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며 소중한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적인 내용과 가르침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학문(Academic)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각 신학의 다양성이 소통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주장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합리적이며 학문적인 대화가 아닙니다. 감리교든, 장로교든, 순복음이든, 성결교든, 기독교의 정통 신앙을 고백하는 교단의 신학이라면 ‘학문’으로서 얼마든지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그래야 합니다.    자신의 주장과 신앙을 유보(留保)하고 타 교단의 신학과 소통하며 서로의 다름을 발견하고 이것을 존중하다 보면 그 신학적 차이는 좁혀질 것이며, 이것이 곧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이루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에서 출발한 ‘신학’을 공부한다면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안으로는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관해 바로 서게 될 것이며, 밖으로는 어떤 이단적 가르침에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며칠전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밉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교회가 교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지 않은 데서 온 결과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교인들을 신학적인 지식으로 바르게 지도했다면, 저런 말도 되지 않는 거짓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교회는 일반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올바른 영성은 올바른 지성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