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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나님은 그 순간 어디 계셨는가?

                                                                                                                        김충연 (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인류 역사 속에서 불의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 순간에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를 신정론(Theodizee)이라고 한다.  즉,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계셨다(E. 위젤)’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전통적인 대답을 벗어나서 새로운 해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위젤의 이런 대답이 슬픔을 당한자들이나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자들에게 더 이상 큰 ‘위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G.W.F. 라이브니즈가 말한대로 ‘함께하시기만 하시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 그런 하나님은 선하시기는 하지만 전능하신 분은 되지 못 한다는 비판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의 모든 사고에 개입하셔서 모든 불행을 막아주신다면,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에 개입하여 조종하시는 분으로, 전능하시기는 하지만 정의롭지는 않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한 자들이 고통받을 때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라는 신정론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답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까?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에게는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다’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렇게 ‘함께하시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지금까지의 신정론적인 접근보다는 인간의 ‘죄론’(Hamartiology)을 그 대안적 접근으로 제안하고 싶다. 즉 인류가 겪는 불의한 사건을 비롯해 (일부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사건을 하나님의 정의나 섭리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죄’의 기원이나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을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당신이 만든 모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역행이며, 다니 엘.L. 밀리오리가 말한 대로 죄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 관계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은 왜 적극적으로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을까?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면 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방의 노예가 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의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이런 일들은 과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일어 나는 일들이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왜 교통사고를 당해야 하는가? 왜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사건과 같은 일들 속에서 무참히 죽어가야 했나? 하나님은 이 사고들을 막아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주변에서 신정론적 접근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된다.

 

   우리는 불의한 인간이 그런 고난을 겪는다면 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욥으로 대변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피워 보지도 못한 꽃과 같은 우리 아이들이 무참히 ‘희생’당한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전통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고난에는 뜻이 있다’라든가,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대답이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숙명일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이것이 교통사고나 질병 같은 개인의 문제이고, 한 번에 그칠 사건이라면 참고 인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는 사안이라면 우리는 침묵만 하고 그분의 신실하심만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이런 불의한 사건들을 인간의 죄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이유는 신정론은 이 사건의 책임과 응답을 ‘신’으로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사건들 속에서 얼마나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 개연성은 충분하겠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우리의 능력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죄의 문제로 보고, 죄론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의 책임과 응답 은 많은 부분 인간에게 있다. 실제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의 원인과 심판 그리고 재발 방지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묻는 신정론적 질문은 하나님께로 향해서는 안 된다. 이 질문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에게, 우리 인간에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생명을 구하지 않은 정부에게, 진실을 은폐하려는 모든 시도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인간이 살인을 저지를 때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으시는 무능력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 전에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이 사건에 대한 암시와 경고를 하셨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 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그런데도 가인은 살인죄를 범하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행위에 관해 물으시고 이어서 심판을 내리신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 4:10).” “이제 네가 땅 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 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창 4:11-12).” 가인에 의해 아벨의 희생을 경험하신 하나님은 그 이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똑같은 무고한 희생을 경험하고 계신다.

 

    아우슈비츠 사건 이후 독일교회가 변했듯이 이제 한국교회도 변해야 한다. 더 이상 세상에 귀를 닫고 ‘중립’의 안전지대에 머무는 자들이 되어선 안 된다. 사회와 정의를 위해 우는 자와 가난한 자들의 울음과 탄식이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분노로 그들의 ‘죄’를 외쳐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더 이상 무고한 희생이 없어지도록, 힘없는 자들이 억울하여 피눈물 흘리는 일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교회가 그들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

 

 

 

 

※ 이 글은 에큐메니안(2015.7.9)에 기고한 글(‘세월호, 하나님이 인간에게 묻다’)을 수정 보완 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