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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함시

10월 23일(수)세계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서 5-형제가 다툴 때(창세기 4:1~24)

살인자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창세기 4:13~15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가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무거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이런 배경에서 가인이 자신의 생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는 생명은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이는 훗날 실제로 규정됩니다(창 9:6).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가인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았는데도 자신의 생명만 염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기 삶과 잘못에 대해 하나님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기 죄를 뉘우친다는 표시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초래한 재앙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은 무신론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사람(창4:3)의 전형이며,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을 되돌리진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더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선하심으로 가인에게 표징을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발견한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함으로써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표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가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합니다. 그 자비는 “십자가에서 두 살인자 옆에 서 계셨을 뿐만 아니라, 살인자를 대신해서 서 계셨던 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인의 살인죄를 속죄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계 역사와 교회 역사 속에서 가인보다 더 강한 분”(W. 뤼티)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적용과 기도  위대하신 하나님, 자신의 죄를 돌이키지 않았던 가인과 달리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함으로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