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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함시생각

하함시 생각 - 업그레이드 되는 신앙!

제2 바울서신의 신학을 중심으로

 

글 | 김충연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신약성서에는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13개의 서신이 있는데, 그중에 소위 바울의 친서라 불리는 7개의 서신(데살로니가전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이 있고, 그의 이름을 빌려 기록된 6개의 제2 바울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 데전/후서, 디도서)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근거는 제2 바울서신에 기록된 필체나 역사적 상황 등이 바울이나 바울 당시보다 시간적으로 후대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려는 것은 그 기준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제2 바울서신이 보여주고 있는 ‘연속성’입니다. 비록 그 서신들이 바울에 의해 친필로 작성된 것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성서’로써 읽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울’과 그의 신학적인 ‘연속성’이 이 서신들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2 바울서신들은 그의 스승이자 모범인 바울의 신학을 계속 이어가면서도 변화된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과감하게 그의 스승의 신학을 보완하고 보충하며 개선해 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죽은 후, 그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들은 거짓 교사들과 열광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혼돈을 겪었지만, 그들은 스승 바울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그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종말론’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소위 ‘임박한 종말론’이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2 바울서신인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런 바울의 신학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날 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2b-3). 이 밖에도 살후 1:7-10이나 2:1-17의 내용들은 살전 4장이나 고전 15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개념이나 신학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종말 사건들의 순서를 예언적, 묵시문학적 표현 방식을 통해 주님의 재림에 앞서 일련의 사건들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의 종말론에 대한 개념을 바울의 제자들이 바로 잡으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교회는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한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을 버려야 합니다(살후 3:6-12).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수정하거나 재조정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교회의 주된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 하며 생활해야 할 것인가?’로 바뀌게 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교리를 받아서 발전시키고 보완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맞지 않다면 시대에 맞게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항상 해석되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맞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바울이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합니다. 만일 교회가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거나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정신을 읽고, 시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고 있던 율법과 잘못된 신앙의 모습에 새로운 정신을 가져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소위 ‘안티테제’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이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인지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자칫 ‘율법’이나 ‘교리’에 고착화 되어 거기에만 매여 있다 보면 율법주의나 문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바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시대에 맞는 해석을 적용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칫하면 시대에 맞는 해석만 추구하다 성경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2 바울서신에서 보듯 ‘연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언제든지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십니다. 성경은 바울 시대나 오늘 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연속선상에서 시대에 맞는 재해석을 통해 오늘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해야만 합니다.

 

   신학교나 교회에서 청년들을 접할 때면 성경이 이들과는 거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왜 성경이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읽히고 있지 않은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이유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너무 먼 옛이야기로 받아들인 데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재해석해 내야 합니다. 성경에 흐르는 연속성에 기반하여 이 시대에 맞는 해석을 과감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것은 아무리 시대가 빠르게 변한다고 해도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아니, 영원히 모든 갇힌 자를 자유케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