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연 (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우리가 접하는 설교나 간증은 대부분 신앙에 긍정적이고 도움을 주는 소위 ‘은혜로운 내용’들 입니다. 즉 절망 속에서 기적처럼 도와주신 하나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로운 이야기의 뒷면에 존재하는 은혜롭지 않은 내용(?)들이나 사건(?)을 접하게 될 때 당황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혼돈 속에 낙심하곤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소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더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대부분 내 기도나 소원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내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성경에서 의외로 이렇게 ‘침묵’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탄식하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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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욥 30:20).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욥은 오랜 시간 호소하였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시 13:1-2).
시편 13편도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탄식과 응답을 요청하는 기도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르짖음에 귀를 닫고 계시는것처럼 느껴져서 슬퍼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요청합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애 3:8).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에 대한 상황을 탄식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합 1:2-3).
하박국 선지자는 악이 번성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그 응답을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하여 토로하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도 응답의 지연과 그것으로 인한 실망 또는 자신의 기대와 어긋난 결과로 인해 좌절하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요 11:21).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응답 지연이 나타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플 때 오셔서 치유하시길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대로 즉각적으로 오지 않으시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도착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눅 24:21).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죽으셨고, 이것은 그들의 기대와 다른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구절들을 읽기만 해도 적잖은 위로를 얻습니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때론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기대와 어긋나게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어서 우리의 작은 머리는 터질 듯 힘들고, 기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아 마음은 너무 슬프고 낙심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내 머리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머리 아프게 왜(why)냐고 묻는 것보다는 어떻게(hwo) 하는 것이 더 좋은가를 모색하면서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우리의 자리를 지키며 버텨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경우 ‘이유’는 지나고 나면 나중에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찾다가 오늘을 슬픔과 절망 속에 보내기보다는, 선하게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공에 대한 확신 속에서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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