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연(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오늘날 우리는 안팎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망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밖으로는 가정과 교회와 직장 등 다양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관계들이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위협들에 굴복한 채 자포자기하듯 인생을 살아가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처럼 경쟁적으로 본능에 충실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별개로 세상의 가치관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끝을 모른 채, 마치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뜨거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환경을 제공한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면서 그들을 향한 미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웁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피해서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양식에서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 시도나 무언가를 해보려는 열정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만 하므로, 그들에게서 더 이상 생산적인 에너지나 공동체를 위한 시너지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잠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합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 면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입니다. 그것은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사랑, 가정, 자신만의 계획이나 목표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잠언은 오늘 우리에게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a)라고 교훈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삶의 근원, 출발 그리고 기본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잠언은 이어서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 4:23b)라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내 생명의 근원이며 꼭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 자신입니다.
‘마음을 지키라’라는 말을 현대인을 위한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나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가지라는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외적인 환경에도 요동하지 않는 절대적인 평안, 이것은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소위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를 갖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α’와 동요, 혼란을 의미하는 ‘ταραχή’의 합성어로 “동요하지 않음” 또는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즉 감정이 외부 환경이나 요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내면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환경을 통제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통제가 가능한 것에는 우리의 판단, 욕망, 의도, 노력 등이 있고,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에는 타인의 행동, 자연현상, 외적인 조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력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말하며, 오히려 통제가 가능한 것들에 집중해서 평상시 이성적 판단의 훈련이나 감정이나 충동에 휘둘리지 않는 판단 능력을 키울 것을 강조하여, 자기 성찰, 절제와 용기, 덕스러운 삶 자체를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씨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씨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당한 부모나 선생이나 상관의 존재는 현재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내면의 평화를 완전히 지배하도록 허용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불의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되, 그것이 우리 내면의 평화를 깨뜨리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차분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해 분노나 좌절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차분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과 훈련이 진정한 아타락시아, 즉 내적 평화가 가능하도록 어느 정도는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아타락시아’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개념인 εἰρήνη(평화)나 γαλήνη(평온)는 자주 등장합니다. 빌립보서 4:7에 비슷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καὶ ἡ εἰρήνη τοῦ θεοῦ ἡ ὑπερέχουσα πάντα νοῦν φρουρήσει τὰς καρδίας ὑμῶν καὶ τὰ νοήματ α ὑμῶν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이 구절에서 사용된 εἰρήνη(평강, 평화)는 아타락시아와 유사한 내적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평안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음을 지키는 법’을 첫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둘째,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셋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교훈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철학은 내가 마음을 평안하게 만드는 방법을 교훈한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지킨다고 제안합니다. 그 제안은 바로 걱정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의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화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함시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1) | 2025.01.03 |
---|---|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1) | 2024.10.30 |
나의 평생에 단 한 가지 소원 (0) | 2024.08.25 |
구원의 확신의 다른 이름은? -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0) | 2024.06.27 |
하함시 생각 - 소원이 소명이다 (0) | 2024.04.21 |